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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Q-English]어휘력은 ‘양’아닌 다양한 표현


[안정효의 Q-English]어휘력은 ‘양’아닌 다양한 표현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가 ‘어휘력’의 의미다. 사람들은 어휘력을 흔히 ‘가짓수’라고 쉽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람’ ‘우정’ ‘민주주의’ 따위, 그것도 특히 명사(noun)를 많이 알면 그것이 곧 어휘력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동차’ ‘사람’ ‘우정’ ‘민주주의’가 영어로 automobile, man, friendship, democracy라고 짝을 지어 암기하고 “내 어휘력은 4개 단어”라고 점수를 매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런 식으로 우리말 한 단어에 영어 한 단어만 달랑 암기하는 식의 공부는 겉핥기로 끝난다. 그 깊이도 지극히 표피적이다. 그러나 “어휘가 풍부하다”는 말은 “표현이 다채롭거나 다양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같은 단어나 표현을 얼마나 다양하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어휘력의 판가름이 난다.

지난주에 우리는 frank라는 단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어휘들을 살펴보았고, 오늘도 계속해서 ‘솔직한’ 얘기를 해보겠다.

<집에 가고 싶어(I Want to Go Home)>에서 파리 만화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 중인 미국 만화가 아돌프 그린은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어머니와의 동거에 들어가기에 앞서 물어본다.

“If I’m overly intimate, overly candid, you kick me out. Don’t explain, just kick me out.”(만일 내가 지나치게 친밀하면, 그러니까 지나치게 솔직하면, 당신이 날 내쫓아버려요. 설명할 필요없이, 그냥 내쫓으라고요.)

그린이 사용한 단어 intimate(친밀한)는 성적인 관계에서 ‘노골적’이라는 뜻이고, 뒤에 나오는 candid(솔직한)는 intimate를 부연한 설명이기 때문에, candid에는 우리말로 ‘노골적’이라는 표현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따라서 candid는 “노골적으로 솔직한” 개념이 된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에서는 쿠르트 유르겐스의 지하도시로 잡혀간 007이 공중에 매달린 감시 카메라를 가리키며 소련 여첩보원에게 설명한다. “You are on the Candid Camera.”(당신은 ‘솔직한 사진기’에 출연 중입니다.)

사진을 얘기할 때의 candid는 “포즈를 취하지 않고 꾸밈없는”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는 온갖 난처한 상황에 일반 시민들을 노출시킨 다음 그들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반응을 살펴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를 개그맨 이경규씨가 흉내 내어 국산화한 것이 ‘몰래카메라’다. 그러니까 candid는 행동 따위가 꾸밈이 없는 그런 솔직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truthful은 더욱 진지한 면모를 지닌다.

인간의 진실성을 탐구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정사(L’Avventura)>의 첫 장면에서 아버지가 레아 마사리에게 ‘솔직함’에 대해 일종의 고백을 한다. “After 30 years of never telling the truth, I might as well speak truthfully to my own daughter now.”(30년 동안 진실이라고는 단 한 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으니, 이제는 내 딸 앞에서만이라도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이야.) 외교관 생활을 하느라고 항상 상대방에게 꼬리가 잡히지 않을 만한 말만 하다 보니, 평생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는 그런 ‘솔직한’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를 배우들이 제작하는 과정을 그린 알 파치노의 걸작 <리처드를 찾아서(Looking for Richard)>에서는 셰익스피어 학자가 배우들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This language is a language of thoughts. In a theatre, to do this you have to speak loud. And then very few actors can speak loud and still be truthful.”(이 언어는 생각의 언어입니다. 극장에서 이 대사를 말하기 위해서 연기자는 큰 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 소리로 말하면서도 여전히 진실성을 전할 능력을 갖춘 배우는 정말로 드뭅니다.” 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이면 가성(假聲)이 과장된 기분을 주기 때문에 감정이 살아나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쯤되면 truthful이라는 솔직함이 ‘진실’의 범주로 넘어간다는 확인이 가능하다. 조금만 더 신경써서 들여다보면 ‘솔직한’은 이 경우에 ‘진실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말에서 ‘솔직한’과 ‘진실한’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이듯이, 영어에서도 frank와 truthful은 완전히 다른 단어다. 그러니까 흔히 비슷한 단어를 서너 개씩 알아두면 비경제적인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단어를 연관지어 무더기로 알아두면, 특히 유사한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그 작은 차이를 잘 알고 있을 때는, 풍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한 빛깔 좋은 표현력이 생겨난다.

이밖에도 ‘솔직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candid 계열의 straightforward(꾸밈없는)와 aboveboard(사실대로)를 거쳐 fair and square(공명정대하게)이 나오고, 가지를 쳐서 나간 truthful 계열에서는 true와 trustworthy(믿을만한), 그리고 true-to-life(사실적인)와 factual, actual, real, legitimate 등으로까지 비약한다.

이렇게 어휘력은 고리를 이루며 갖가지 단어를 쾌로 엮어가는 사이에 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 한 단어에 우리말 한 단어” 또는 “우리말 한 단어에 영어 한 단어”식으로 약삭빠르게 계산하는 학습방법은 결국 자신에게 손해다. 언어 학습은 궁극적으로 어휘력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