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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Q-English]“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안정효의 Q-English]“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영국으로 간 콜롬보의 goose chase(기러기 쫓아다니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만 샛길로 한참 빠져버린 느낌이 들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형사 콜롬보>가 구사하는 갖가지 기법을 다시 살펴보겠다.

남의 글을 몰래 베껴먹는 범죄 행위 표절과는 달리, 타인의 멋진 말을 적절히 차용하여 자신의 화법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인유(引喩, allusion)와 인용(引用, quotation)은 글쓴이의 교양과 지식이 바탕을 이루어야 하며, 그런 글은 읽는 사람에게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기쁨을 주기도 한다.

그런 예를 <형사 콜롬보> ‘박물관의 살인(Old Fashioned Murder)’ 편에서 찾아보자면, 지적인 노처녀 박물관장이 오빠에게 신세한탄을 하다가 남의 말을 자기 말처럼 인용한다.
 

“Compliment is something like a kiss through a veil.”(칭찬은 베일을 쓰고 하는 입맞춤과 같아요.) 문화적 수준이 비슷한 오빠가 그 인용문의 출처를 짐작하고는, 죽을 맞춘다. “Oscar Wilde?”(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냐?) “Victor Hugo.”(빅토르 위고요.)

잠시 후에 박물관장이 오빠에게 다시 compliment라는 같은 말이 담긴 명언을 절반쯤 엮어 넣어서 자신의 절박하고 솔직한 심경을 어느 정도 희석시키며 토로한다. “Nowadays we are so hard up that only pleasant thing to pay is―a compliment.”(요즈음엔 생활이 너무 궁핍하다 보니, 줄 만한 즐거운 선물이 칭찬밖에 없군요.)

오빠가 묻는다. “Victor Hugo?”(빅토르 위고가 한 말이냐?) “Oscar Wilde.”(오스카 와일드인데요.)

‘살인의 줄거리(Murder by the Book)’ 편에서는 트로이 도나휴가 쓰는 소설의 내용이 타자기에 꽂힌 종이에 이렇게 찍혀 나온다.

“J’accuse,” said Mrs. Melville, pointing at the doctor.

Mrs. Melville(멜빌 부인)은 애거타 크리스티가 창조해낸 미스 마플(Miss Jane Marple)을 연상시키는 아줌마 명탐정이다. 그리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의사를 가리키며 외친 “J’accuse”(나는 고발한다)는 프랑스 군부의 비리를 폭로한 포병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무고하게 투옥된 다음, 그의 결백을 주장하며 구명운동에 나선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의 첫 문장에서, 그리고 뒤이어서 후렴처럼 거듭거듭 반복하는 말인데, 워낙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말이니까 프랑스어 그대로 알아두기 바란다.

드레퓌스 사건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언급하고, 졸라와 절친했던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풍자물 <현대사(Histoire contemporaine)> 총서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The Life of Emile Zola)>에서는 극적인 기둥줄거리를 이룬다.

영화에서 레이몬드 매씨(졸라 역)는 신문에 이런 글을 싣는다. “I accuse the War Office of having viciously misdirected public opinion and cover up the sins.”(나는 그들의 죄를 은폐하려고 여론을 사악하게 오도한 국방성을 고발한다.) 졸라가 되살아나 여의도에 와서, 조폭처럼 패를 지어 날이면 날마다 싸움질을 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보았더라면 아마 이런 소리를 했으리라. “I accuse you for pretending to be politicians!”(정치가라고 사기 치는 네놈들을 고발한다!)

<형사 콜롬보> ‘나 잡아봐라(Try and Catch Me)’ 편에 등장하는 여성 추리작가 루드 고든은 그녀의 범죄 사실을 알고 은근히 협박해오는 비서 매리에트 하틀리의 환심을 사려고 일찍 퇴근시키며 유명한 인용문을 동원한다. “Tomorrow is another day, isn’t it?”(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내일 해도 괜찮으니 오늘은 집에 가서 쉬라는 말이다. 어떤 일을 꼭 오늘 할 필요가 없고, 내일로 미뤄도 되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평범한 의미가 담긴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말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언으로 인용되는 까닭은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때문이다.

힘든 일에는 관심이 없고 공주 대접을 받으며 남자들과 어울려 놀기만 좋아하는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반복하고, 소설과 영화 모두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그녀의 말로 끝난다.

번역과 연관 지어 다른 곳에서 이미 지적한 바이지만,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을 때는 주인공의 성격을 한 마디로 부각시키는 이 간단한 문장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식으로 잔뜩 멋을 부려 자막에 옮겨 놓았다.

이 화려한 번역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요즈음에도 마치 그것이 원문의 내용 그대로인 줄 잘못 알고 열심히 암기하여 인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쩐지 과잉 충성을 하는 간신이 득세하여 나랏일을 망치는 현상을 연상시키는 듯 싶어서 뒷맛이 별로 좋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