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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Q-English]취임 연설문을 통해 본 오바마 화법 上


[안정효의 Q-English]취임 연설문을 통해 본 오바마 화법 上




ㆍ반복·반전의 수사학 세계인 마음 꿰뚫다

여의도에서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추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국 정치는 참으로 조폭과 생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의장 문을 쇠사슬로 묶어 잠그고 영토를 사수하겠다는 패거리와 할리우드 공포영화에나 등장하는 살인마처럼 전기톱을 들고 쳐들어가는 다른 패거리의 죽고살기 행태만이 조폭을 닮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도 솜씨를 과시하며 상대방을 집어던지거나 서로 멱살을 잡고 잡배처럼 싸움박질을 벌이는 꼬락서니만이 조폭을 닮은 것이 아니다.


열심히 줄서기를 해서 작당(作黨)한 다음, 자신의 소견이나 철학은 아예 없이, 맹목적인 충성심을 살려 두목(정당)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일사불란한 행태 또한 조폭 그대로다. 그리고는 일단 권력을 잡은 두목이, 신념과 실력을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공신들에게 좋은 자리를 나눠주는 전통 역시, 세력을 키운 다음 조폭 두목이 주먹 공신들에게 여기저기 업소의 영업권을 나눠주는 관습과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정치에는 배척해야 할 적과 이용해 먹을 동지는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별로 없으며, 정권이 바뀌면 기득권자들을 작살내고 쓸어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래서 정치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은 입안 가득 신물을 담고, “지겨워서 뉴스를 보기가 싫다”고 얼굴을 찌푸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버락 오바마 신임 미국 대통령의 싱싱한 정치에서 호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자유와 도덕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권력을 장악한 네오콘(新保守主義) 집단은 마음에 들지 않는 외국 권력을 쳐부수기 위해 침략을 일삼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락 침략을 전후에서는 물론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이런 말이 나왔다.

“We shall prevail.”(우리는 지배하리라.)

그뿐 아니라 핍박을 받던 민족이라고 알려졌던 이스라엘 백성은 미국의 독단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침략과 학살의 기치를 드높이 휘날렸다. 그러다가 이런 살벌한 대립과 증오의 난장 한쪽 구석에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If there’s an Arab American family being rounded up without benefit of an attorney or due process, that threatens my civil liberties. It’s that fundamental belief -I am my brother’s keeper, I am my sister’s keeper- that makes this country work.

(만일 어느 아랍계 미국인 가족이 검거되어 변호사나 적절한 절차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시민으로서의 내 자유가 위협을 받는 셈이다. 내 형제는 내가 지켜주고 내 자매는 내가 지켜준다- 그 기본적인 신념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9·11 사태 이후 이슬람 세계를 타도하기 위해 외국의 국가 원수(사담 후세인)를 처형하는 작업에 거침없이 앞장을 섰던 부시의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리라” 정치철학을 이 예문은 정면에서 도전한다. 그리고 I am my brother’s keeper(내 형제는 내가 지켜준다)라는 흔한 영어 표현까지도 남녀평등 정신을 살려 I am my sister’s keeper라는 조건을 보완했다. 이런 인식은 오바마가 내세운 ‘통합’이라는 주제의 기본 맥락을 이룬다.

더구나 오바마의 중간 이름(middle name)이 Hussein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아랍계 미국인 가족”을 지켜주겠다는 이 연설은 미국의 반이슬람 정신에 대한 공격이라고까지 하겠다.

하지만 오바마의 주제는 도전이나 반발이 아니고, 정복이나 군림은 더욱 아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가 한 연설에서 위 예문은 이런 말로 이어진다.



It’s what allows us to pursue our individaul dreams, yet still come together as a single American family. “E pluribus unum.” Out of many, one.

(그런 정신이 우리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면서도 단 하나의 미국인 가족으로 단합하게끔 해주는 힘이다. E pluribus unum. 그렇게 여럿으로부터 하나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분명히 존 케리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찬조연설의 한 부분이었지만, 지금 세계는 2004년 7월27일에 존 케리 본인이 무슨 연설을 했는지 한 마디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E pluribus unum(여러 민족이 모여 새로운 한 민족이 되었다는 뜻. 미국의 표어.)을 강조하며 오바마가 다음에 이어나간 단 세 개의 문장은 전당대회에 참석한 정치인들뿐 아니라 미국 국민을 감동시켰고, 그로부터 겨우 4년 후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Yet even as we speak, there are those who are preparing to divide us, the spin masters and negative ad peddlers who embrace the politics of anything goes. Well, I say to them tonight, there’s not a liberal America and a conservative America ― there’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s not a black America and White America and Latino America and Asian America: there’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막 나가는 정치를 신봉하는 흑색선전 장사꾼들과 달변가들은 우리 국민을 갈라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으니, 진보적인 아메리카와 보수적인 아메리카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아메리카 합중국만이 존재합니다. 흑인의 미국과 백인의 미국과 라틴계 미국과 아시아계 미국이 따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메리카 합중국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오바마가 미국을 감동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통합이라는 뚜렷하고도 일관된 주제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자주 전쟁을 벌이는 조국에 대한 도덕적 수치심, 그리고 끊임없는 흑백 갈등과 모함을 일삼는 흑색 정치에 환멸하는 국민에게 오바마의 주제는 새로운 생명의 숨결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주제를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표현했고, 시적인 화법과 수사학을 구사해가며 전달했다. 예를 들어 위 예문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에서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말할 때, 오바마는 United States 다음에 잠시 숨을 고른다. 여기에서 states는 물론 미국의 여러 주를 의미하지만, ‘국가’라는 뜻이기도 해서, of America는 부속된 명칭이요, “통일된 여러 나라”라는 말이 오히려 깃발처럼 두드러져 보인다.

E pluribus unum 신조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뚜렷하고 일관된 주제는 2008년 취임연설에서 이런 논리로 이어진다.



They saw America as bigger than the sum of our individual ambitions, greater than all the differences of birth or wealth or faction.

(우리 조상들은 미국이 우리들 개개인의 야망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크고, 출생과 재산과 파벌의 모든 차이를 훨씬 능가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예문에서는 bigger와 greater라는 두 개의 비교급 단어를 병치(juxtaposition)시킴으로써 반복에 의한 시적인 장단(rhythm)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똑같은 주제를 오바마는, 다음 예문에서처럼, 부정적인 두 번째 진술을 첫 번째 긍정적 진술로 끌고 올라가 이미 제시된 명제를 강조하는 반전 화법을 쓰기도 한다.



For we know that our patchwork heritage is a strength, not a weakness.

(우리가 물려받은 누더기 유산은 약점이 아니라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오바마의 취임식을 중계하던 방송인들은 미국식 peaceful transfer of power(평화적 정권 교체)를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미국 사회가 이루어낸 “소리 없는 혁명,” 유혈과 갈등이 아니라 건설적인 화해의 정신으로 실현한 혁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것은 오바마가 이렇게 부르짖은 혁명이었다.



To those leaders around the globe who seek to sow conflict, or blame their society’s ills on the West, know that your people will judge you on what you can build, not what you destroy. To those who cling to power through corruption and deceit and the silencing of dissent, know that you are on the wrong side of history, but that we will extend a hand if you are willing to unclench your fist.

(분쟁의 씨앗을 뿌리려고 꿈꾸거나, 그들 사회의 병폐를 서방의 탓으로 돌리려는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이르건데, 무엇을 파괴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건설하느냐를 보고 국민은 그대를 심판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고 부패와 기만으로 권력에 매달리려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역사의 그릇된 쪽에 섰음을 알아야 하지만, 만일 그대들이 주먹을 펴고 악수를 원한다면 우리도 손을 내밀 것이다.)



존 F. 케네디의 취임연설에서 friends and foes alike(우방과 적국에게 다 같이)라며 단호한 자세를 천명하던 유명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주제’는 겹치는 반대 진술에 의한 번복을 통해 강조하는 기법을 동원하면서, 성서적 또는 예언자적인 명령형을 구사한다. 그러나 오바마 연설의 가장 기본적인 힘은 문학적 화법과 그 뒷맛에서 비롯한다.